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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브라힘 (오스만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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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브라힘은 1640년부터 1648년까지 오스만 제국의 술탄으로 재위했다. 그는 아흐메드 1세의 아들이자 쾨셈 술탄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형제인 무라드 4세가 죽은 후 즉위했다. 이브라힘은 즉위 전 카페스에 유폐되어 정신적 고통을 겪었으며, 재위 기간 동안 변덕스러운 성격과 기행으로 인해 실정을 거듭했다. 결국 예니체리, 울레마, 어머니 쾨셈 술탄의 반발로 폐위되어 1648년 살해당했다. 그는 10명 이상의 아들과 10명 이상의 딸을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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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브라힘 (오스만 제국)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브라힘 1세
이브라힘 1세
칭호오스만 칼리파
아미르 알-무미닌
카이세르-이 룸
두 성지의 수호자
통치술탄(파디샤)
재위 기간1640년 2월 9일 – 1648년 8월 8일
즉위식알 수 없음
선임자무라트 4세
섭정알 수 없음
후임자메흐메트 4세
배우자투르한 술탄
살리하 딜라슈브 술탄
무아제즈 술탄
아이셰 술탄
마히엔베르 술탄
사츠바을르 술탄
시베카르 술탄
후마샤 술탄
기타
자녀메흐메트 4세
게브헤르한 술탄
쉴레이만 2세
아흐메트 2세
기타
전체 이름이브라힘 빈 아흐메트
왕조오스만 왕조
아버지아흐메트 1세
어머니쾨셈 술탄
출생일1615년 11월 5일
출생지톱카프 궁전, 콘스탄티노플, 오스만 제국
사망일1648년 8월 18일
사망지콘스탄티노플, 오스만 제국
매장지아야 소피아, 이스탄불, 튀르키예
종교수니 이슬람
이브라힘의 투으라
이브라힘의 투으라
생애
별칭델리 이브라힘 (광인 이브라힘)

2. 즉위 전 생애

이브라힘은 1615년 11월 5일에 아흐메드 1세 술탄과 그의 하세키 술탄이자 법적인 아내였을 가능성이 있는 쾨셈 술탄의 아들로 태어났다. 이브라힘이 2살 때 그의 아버지가 갑자기 사망했고, 이브라힘의 삼촌인 무스타파 1세가 새로운 술탄이 되었다. 쾨셈 술탄과 어린 이브라힘을 포함한 그녀의 아이들은 옛 궁전으로 보내졌다.

그의 형제 무라드 4세가 삼촌 무스타파 1세로부터 왕위를 물려받은 후, 이브라힘은 카페스에 감금되었고, 이로 인해 건강이 악화되었다. 무라드는 이브라힘의 다른 형제들인 셰흐자데 바예지드, 셰흐자데 쉴레이만 그리고 셰흐자데 카심을 처형했고, 이브라힘은 자신이 다음 차례가 될까 두려워했다.

무스타파 1세의 두 번째 퇴위 후, 형인 무라드 4세가 즉위했고, 이브라힘은 카페스에 유폐되었다. 무라트 4세의 치세 동안, 형제인 슐레이만, 바예지드, 셀림, 카심 등이 살해되는 가운데 이브라힘의 마음은 병들어 갔고, 25년간을 "황금 새장"에서 보낸 경험이 그의 정신의 균형을 무너뜨렸다. 무라트 4세는 붕어 직전에 이브라힘을 살해하도록 명령했지만, 쾨셈 술탄에 의해 저지되었다.

2. 1. 출생과 유년 시절

이브라힘은 1615년 11월 5일에 아흐메드 1세 술탄과 그의 하세키 술탄이자 법적인 아내였을 가능성이 있는 쾨셈 술탄의 아들로 태어났다. 이브라힘이 2살 때 그의 아버지가 갑자기 사망했고, 이브라힘의 삼촌인 무스타파 1세가 새로운 술탄이 되었다. 쾨셈 술탄과 어린 이브라힘을 포함한 그녀의 아이들은 옛 궁전으로 보내졌다. 그의 형제 무라드 4세가 삼촌 무스타파 1세로부터 왕위를 물려받은 후, 이브라힘은 카페스에 감금되었고, 이로 인해 건강이 악화되었다. 무라드는 이브라힘의 다른 형제들인 셰흐자데 바예지드, 셰흐자데 쉴레이만 그리고 셰흐자데 카심을 처형했고, 이브라힘은 자신이 다음 차례가 될까 두려워했지만, 형제 무라드의 죽음 이후 이브라힘은 술탄이 되었다.

무스타파 1세의 두 번째 퇴위 후, 형인 무라트 4세가 즉위했고, 이브라힘은 카페스에 유폐되었다. 무라트 4세의 치세 동안, 형제인 슐레이만, 바예지드, 셀림, 카심 등이 살해되는 가운데 이브라힘의 마음은 병들어 갔고, 25년간을 "황금 새장"에서 보낸 경험이 그의 정신의 균형을 무너뜨렸다. 무라트 4세는 붕어 직전에 이브라힘을 살해하도록 명령했지만, 쾨셈에 의해 저지되었다.

2. 2. 카페스 유폐

이브라힘은 1615년 11월 5일에 아흐메드 1세 술탄과 그의 하세키 술탄이자 법적인 아내였을 가능성이 있는 쾨셈 술탄의 아들로 태어났다. 이브라힘이 2살 때 그의 아버지가 갑자기 사망했고, 이브라힘의 삼촌인 무스타파 1세가 새로운 술탄이 되었다. 쾨셈 술탄과 어린 이브라힘을 포함한 그녀의 아이들은 옛 궁전으로 보내졌다. 그의 형제 무라드 4세가 삼촌 무스타파 1세로부터 왕위를 물려받은 후, 이브라힘은 카페스에 감금되었고, 이로 인해 건강이 악화되었다. 무라드는 이브라힘의 다른 형제들인 셰흐자데 바예지드, 셰흐자데 쉴레이만 그리고 셰흐자데 카심을 처형했고, 이브라힘은 자신이 다음 차례가 될까 두려워했지만, 형제 무라드의 죽음 이후 이브라힘은 술탄이 되었다.

무스타파 1세의 두 번째 퇴위 후, 형인 무라트 4세가 즉위했고, 이브라힘은 카페스에 유폐되었다. 무라트 4세의 치세 동안, 형제인 슐레이만, 바예지드, 셀림, 카심 등이 살해되는 가운데 이브라힘의 마음은 병들어 갔고, 25년간을 "황금 새장"에서 보낸 경험이 그의 정신의 균형을 무너뜨렸다. 무라트 4세는 붕어 직전에 이브라힘을 살해하도록 명령했지만, 쾨셈에 의해 저지되었다.

3. 재위 기간

1640년, 형 무라트 4세가 붕어한 후 즉위했지만, 형의 갑작스러운 붕어에 대한 슬픔과 궁궐 내 음모에 대한 공포 때문에 황제로서 즉위한 것을 전혀 기쁘게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이에 대해 "황금 새장"에서 나올 때 황위 찬탈을 두려워한 형에 의해 형제 살해가 벌어질 날이 왔다고 겁을 먹고 나오려 하지 않았지만, 형의 시체를 눈앞에 두고서야 안심하고 "황금 새장"을 나왔다는 이야기도 있다.

즉위 초에는 자비롭게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데 힘썼지만, 어머니인 황태후와 당시의 대재상이 실권을 잡고 있었기에 그다지 많은 업적을 남기지 못했다.

이브라힘은 변덕스럽고 방종하며 음란한 황제였으며, 많은 보석류를 수영장에 던져 넣고는 하렘의 여인들이 물속에서 줍는 모습을 바라보며 즐거워하거나, 하루에 24명의 여자와 성행위를 하거나, 궁전 정자에서 밖의 길가는 사람들에게 활을 쏘아 즐기는 등, 상식을 벗어난 수많은 기행을 했다고 한다. 게다가, 아들인 훗날의 메흐메트 4세목욕탕에 던지거나 로도스 섬으로 유배 보내려 하는 등, 이상한 행동을 보이기 시작했고, "델리"(터키어로 광인)라고까지 불리게 되었다.

또한 극도의 비만 혐오를 보였으며, 제국 내에서 가장 뚱뚱한 여성을 찾도록 명하고, 쉬베카르라는 상인의 딸을 사랑했다. 치세 말기에는 휴머샤라는 노예를 사랑하여, 오스만 왕가의 관례에 반하여 정식으로 결혼을 했다. 이 결혼은 이브라힘의 기행으로 꼽히지만, 술레이만 1세와 휠렘의 정식 결혼이 동시대 사람들에게 눈살을 찌푸리게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브라힘의 결혼에 대한 악평은 중상일 가능성도 고려해야 한다.

이브라힘의 궁정에는 수상한 사람들이 드나들었고, 하렘은 셰케르팔 하툰이라는 수상한 여자가 관리했으며, 이브라힘의 병을 치료하는 척하며 사복을 채운 진지 호자 등의 기도사도 드나들었다. 그러한 인물들이 정부 고관까지 올라가, 진지 하지는 최종적으로 아나톨리아의 재판관이 되었다. 궁정 내는 실질적으로 어머니인 쾨셈 술탄이 관리했다.

치세 전반은 대재상인 케만케쉬 카라 무스타파 파샤의 지휘하에 무라트 4세와 같은 엄격한 규율을 완화했다. 1642년에는 오스트리아와 새로운 평화를 맺었고, 같은 해에 아조프를 코사크로부터 탈환했다. 게다가 화폐 개혁으로 통화 가치를 안정시키고, 새로운 토지 조사를 실시하여 재정을 안정시키려 했다. 케만케쉬는 이브라힘을 지도하기 위해, 지금도 남아있는 통치에 관한 메모를 보냈다. 이브라힘은 종종 변장하고 이스탄불의 거리를 시찰하며, 대재상에게 다양한 문제를 수정하도록 명했다. 그러나 쾨셈에 의해 케만케쉬는 1644년에 처형되었다.

1645년, 군사적으로도 행정적으로도 능력이 없는 측근들에 의해 시작된 크레타 섬 포위는 베네치아의 보복을 초래했다. 1646년에는 베네치아 해군에 의해 다르다넬스 해협이 봉쇄되어, 이스탄불이 곤경에 빠졌다.

3. 1. 즉위 과정

이브라힘은 1640년 형인 무라트 4세가 죽은 뒤 오스만 제국의 술탄 자리를 이어받았다. 이브라힘은 즉위 전까지 카페스(Kafes)라는 밀실에 갇혀 지냈으며, 형제 3명이 무라드 4세에 의해 처형된 탓에 다음 희생자가 될까 봐 두려워했다.[6] 그의 목숨은 어머니 쾨셈 술탄(Kösem Sultan)의 간청 덕분에 보존되었다.[6]

무라드 4세가 사망하면서 이브라힘은 왕조의 유일한 생존 왕자가 되었다. 대재상(Grand Vizier) 케만케쉬 카라 무스타파 파샤(Kemankeş Kara Mustafa Pasha)가 즉위를 요청했지만, 이브라힘은 무라드 4세가 살아있고 자신을 함정에 빠뜨리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의심했다. 쾨셈 술탄과 대재상의 설득, 그리고 형의 시신을 직접 확인한 후에야 왕위를 받아들였다.[6]

즉위 초, 이브라힘은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데 힘썼다. 하지만, 어머니인 황태후와 당시의 대재상이 실권을 잡고 있었기에 많은 업적을 남기지 못했다.

치세 전반은 대재상 케만케쉬 카라 무스타파 파샤의 지휘 아래 무라트 4세 때와 같은 엄격한 규율을 완화했다. 1642년 오스트리아와 새로운 평화를 맺었고, 같은 해 아조프를 코사크로부터 탈환했다. 화폐 개혁으로 통화 가치를 안정시키고, 새로운 토지 조사를 실시하여 재정을 안정시키려 했다. 케만케쉬는 이브라힘을 지도하기 위해 통치에 관한 메모를 보냈고, 이브라힘은 종종 변장하고 이스탄불 거리를 시찰하며 대재상에게 여러 문제를 수정하도록 명했다. 그러나 쾨셈 술탄에 의해 케만케쉬는 1644년에 처형되었다.

1645년, 군사적, 행정적으로 능력이 없는 측근들에 의해 시작된 크레타 섬 포위는 베네치아의 보복을 초래했다. 1646년에는 베네치아 해군에 의해 다르다넬스 해협이 봉쇄되어 이스탄불이 곤경에 빠졌다.

3. 2. 초기 통치와 개혁 시도

이브라힘은 1640년 형 무라트 4세가 붕어한 후 즉위했다.[11] 즉위 초반, 이브라힘은 정치에서 물러나 하렘에서 위안을 찾았고, 하렘은 향수, 직물, 보석 등으로 사치를 누렸다.[7][8] 그는 여성과 모피에 대한 애정으로 "''Le Fou de Fourrures''" (모피광)이라고 불렸다.[7]

카라 무스타파 파샤는 이브라힘 통치 초기 4년 동안 대재상으로 재임하며 제국을 안정시켰다.[10] 그는 1642년 3월 15일 세브르 조약을 통해 오스트리아와 평화를 갱신하고, 같은 해 아조프를 코사크족으로부터 되찾았다.[10] 카라 무스타파는 화폐 개혁, 토지 측량, 예니체리 수 감축 등을 통해 경제를 안정시키려 노력했다.[10] 이브라힘은 대재상과 서신을 주고받으며 제국 통치에 관심을 보였고, 변장을 하고 이스탄불 시장을 시찰하며 문제를 바로잡도록 명령하기도 했다.[11]

즉위 초기에 이브라힘은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데 힘썼지만, 어머니 황태후 쾨셈 술탄과 대재상이 실권을 잡고 있어 많은 업적을 남기지 못했다. 그는 변덕스럽고 방종한 성격으로, 많은 기행을 일삼았다고 전해진다. 보석을 수영장에 던져 하렘의 여인들이 줍게 하거나, 궁전 정자에서 길 가는 사람들에게 활을 쏘는 등의 행동을 했다.[9]

그는 극도의 비만 혐오를 보였으며, 제국 내에서 가장 뚱뚱한 여성을 찾도록 명하여 쉬베카르라는 여성을 총애했다. 치세 말기에는 휴머샤라는 노예와 오스만 왕가의 관례를 깨고 정식으로 결혼하기도 했다. 이브라힘의 궁정에는 진지 호자와 같은 수상한 사람들이 드나들었고, 하렘은 셰케르팔 하툰이라는 여자가 관리했다.

치세 전반은 대재상 케만케쉬 카라 무스타파 파샤의 지휘하에 무라트 4세와 같은 엄격한 규율을 완화했다. 1642년 오스트리아와 새로운 평화를 맺고, 아조프를 코사크로부터 탈환했다. 케만케쉬는 화폐 개혁과 토지 조사를 실시하여 재정을 안정시키려 노력했다. 그러나 쾨셈에 의해 케만케쉬는 1644년에 처형되었다.

3. 3. 실정과 기행

이브라힘은 재발하는 두통과 신체 쇠약 발작에 자주 시달렸는데,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 때문으로 보인다.[12] 오스만 왕조의 유일한 생존 남성이었던 그는 어머니 쾨셈 술탄의 권유로 하렘의 여인들에게서 위안을 찾았고, 메흐메트 4세, 술레이만 2세, 아흐메드 2세를 낳았다. 쾨셈 술탄은 하렘을 통해 권력을 얻어 이브라힘의 이름으로 통치했지만, 결국 이브라힘의 의심을 사 황궁을 떠나야 했다.[13]

즉위 초, 이브라힘은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데 힘썼다. 형 무라트 4세가 붕어한 후 즉위했지만, 슬픔과 궁궐 내 음모에 대한 공포로 즉위를 기뻐하지 않았다. "황금 새장"에서 나올 때 황위 찬탈을 두려워한 형에 의해 형제 살해가 벌어질 날이 왔다고 겁을 먹고 나오려 하지 않았지만, 형의 시체를 눈앞에 두고서야 안심하고 나왔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브라힘은 제국 하렘의 여주인 셰케르파레 하툰과 술탄의 신체적 질병을 치료하는 척한 돌팔이 친치 호자와 같은 부적절한 사람들의 영향을 받았다. 친치 호자는 실라흐다르 유수프 아가 및 술탄자데 메흐메트 파샤와 함께 뇌물을 축적했고, 대재상 Ḳara Muṣṭafā의 처형을 확보할 만큼 권력을 남용했다. 친치 호자는 아나톨리아의 카디아스크(고위 판사)가 되었다. 유수프 아가는 카푸단 파샤(대제독)가 되었고, 술탄자데 메흐메트는 대재상이 되었다.[12]

그의 측근들이 권력을 잡으면서, 이브라힘의 사치스러운 경향은 심해졌다. 그는 8명의 첩을 하세키(왕실 배우자)의 지위로 승격시켜 부와 토지를 하사했다.[14] 첩 텔리 하세키와 법적으로 결혼한 후, 이브라힘 파샤의 궁전을 담비 모피로 덮고 그녀에게 주라고 명령했다.[12] 그는 많은 보석을 수영장에 던져넣고 하렘의 여인들이 줍는 모습을 보며 즐거워하거나, 궁전 정자에서 길 가는 사람들에게 활을 쏘는 등 기행을 일삼았다. 아들 메흐메트 4세목욕탕에 던지거나 로도스 섬으로 유배 보내려 하는 등 이상 행동을 보여 "델리"(터키어로 광인)라고 불렸다.

극도의 비만 혐오를 보였던 이브라힘은 제국 내에서 가장 뚱뚱한 여성을 찾게 했고, 쉬베카르라는 상인의 딸을 총애했다. 말년에는 노예였던 휴마샤와 오스만 왕가의 관례를 어기고 정식 결혼을 했다.

이브라힘의 궁정에는 셰케르팔 하툰, 진지 호자 등 수상한 인물들이 드나들었다. 진지 호자는 아나톨리아의 재판관까지 되었다. 궁정은 실질적으로 어머니 쾨셈 술탄이 관리했다.

치세 전반은 대재상 케만케쉬 카라 무스타파 파샤의 지휘 아래 무라트 4세 때의 엄격한 규율을 완화했다. 1642년 오스트리아와 평화를 맺고, 아조프를 코사크로부터 탈환했다. 화폐 개혁, 토지 조사로 재정을 안정시키려 했다. 케만케쉬는 이브라힘에게 통치에 관한 메모를 보냈고, 이브라힘은 변장하고 이스탄불 거리를 시찰하며 대재상에게 문제를 수정하도록 명했다. 그러나 쾨셈 때문에 케만케쉬는 1644년 처형되었다.

1644년, 몰타 해적이 메카로 향하던 배를 나포하고 크레타에 정박하자, 카푸단 유수프 파샤는 이브라힘에게 섬 침략을 권했다. 이는 베네치아와의 24년 전쟁을 일으켰다. 베네치아 함선은 에게 해에서 승리하여 테네도스 (1646)를 점령하고 다르다넬스 해협을 봉쇄했다. 카푸단 유수프는 카니아 정복에 성공했지만, 대재상 네베신리 살리 파샤와의 경쟁으로 1646년 1월 처형되었고, 대재상은 1645년 12월 폐위되었다. 1646년 베네치아 해군에 의해 다르다넬스 해협이 봉쇄되어 이스탄불은 곤경에 빠졌다.

3. 4. 크레타 전쟁과 베네치아와의 갈등

1644년, 몰타 해적이 메카로 향하던 고위 여행객을 태운 배를 나포하는 사건이 발생했다.[12] 해적들이 크레타에 정박하자, 카푸단(대제독) 유수프 파샤는 이브라힘에게 섬 침략을 권유했다.[12] 이는 베네치아와의 24년 전쟁의 시작이었다. 오스만 제국은 1669년이 되어서야 크레타 섬을 완전히 점령하였다.[12]

베네치아 함선은 에게 해 전역에서 승리를 거두었고, 1646년에는 테네도스를 점령하고 다르다넬스 해협을 봉쇄하여 이스탄불을 곤경에 빠뜨렸다.[12] 카푸단 유수프는 카니아 정복에 일시적으로 성공했지만, 대재상 네베신리 살리 파샤와의 경쟁으로 인해 1646년 1월에 처형되었다.[12]

4. 폐위와 죽음

국고 부족을 야기한 다르다넬스 해협의 베네치아 봉쇄와 이브라힘의 변덕을 채우기 위한 전시 경제 기간 동안 과중한 세금 부과는 대중의 불만을 증폭시켰다.[14] 1647년, 대재상 네베신리 살리 파샤, 쾨셈 술탄, 그리고 셰흐울이슬람 압두르라힘 에펜디는 술탄을 폐위시키고 그의 아들 중 한 명을 옹립하려는 계획을 세웠으나 실패했다. 살리 파샤는 처형되었고, 쾨셈 술탄은 하렘에서 추방되었다.[14]

다음 해, 예니체리들과 울레마 구성원들이 반란을 일으켰다.[12] 1648년 8월 8일, 부패한 대재상 아흐메드 파샤는 분노한 군중에 의해 목 졸려 죽임을 당했고, 사후에 "헤자르파레" (천 조각)라는 별명을 얻었다.[12] 같은 날, 이브라힘은 체포되어 톱카프 궁전에 투옥되었다.[13] 쾨셈은 아들의 몰락에 동의하며 "결국 그는 너와 나를 모두 죽일 것이다. 우리는 정부에 대한 통제력을 잃을 것이다. 사회 전체가 붕괴될 것이다. 그를 즉시 왕좌에서 끌어내려라"라고 말했다.[15]

이브라힘의 여섯 살 아들 메흐메트 4세가 술탄이 되었다. 새로운 대재상 소푸 메흐메드 파샤는 셰이크 울-이슬람에게 이브라힘의 처형을 승인하는 파트와를 요청했다. "두 명의 칼리프가 있다면, 그 중 한 명을 죽여라"라는 메시지와 함께 그것은 허가되었다. 쾨셈 또한 동의했다. 두 명의 처형인이 파견되었는데, 그 중 한 명은 이브라힘 밑에서 일했던 수석 처형인이었다.[16] 처형인들이 가까워지자 이브라힘의 마지막 말은 "내 빵을 먹은 자들 중에 나를 불쌍히 여기고 보호해 줄 사람이 없단 말인가? 이 잔인한 자들이 나를 죽이러 왔다. 자비를! 자비를!"였다고 한다. 어머니인 쾨셈 술탄과 관리들이 궁전 창문에서 지켜보는 가운데, 이브라힘은 1648년 8월 18일에 목 졸려 죽었다. 그의 죽음은 오스만 제국 역사상 두 번째 국왕 시해였다.

1648년, 이브라힘은 갑자기 자신의 하렘에 있던 시녀와 여관, 환관 등 280명을 모두 자루에 넣어 보스포루스 해협에 던져 버리는 만행을 저질렀다.

예니체리 군단에 대한 과세를 시도한 아흐메트 파샤에 대해 예니체리들이 봉기하자, 울라마와 어머니 쾨셈 술탄까지 동조하여 이브라힘은 폐위되어 살해되었다. 아흐메트 파샤 또한 살해되었고, 민중들의 분노를 사, 시신이 토막 난 채 흩어졌다. "헤자르파레"라는 단어는 "천 개"를 의미한다.

4. 1. 대중의 불만과 반란

다르다넬스 해협의 베네치아 봉쇄와 이브라힘의 사치를 위한 과중한 세금 부과는 대중의 불만을 야기했다.[14] 1647년, 대재상 네베신리 살리 파샤, 쾨셈 술탄, 셰흐울이슬람 압두르라힘 에펜디는 술탄 폐위 계획을 세웠으나 실패했고, 살리 파샤는 처형, 쾨셈 술탄은 하렘에서 추방되었다.[14]

다음 해, 예니체리들과 울레마 구성원들이 반란을 일으켰다.[12] 1648년 8월 8일, 부패한 대재상 아흐메드 파샤는 분노한 군중에 의해 목 졸려 죽임을 당했고, 사후에 "헤자르파레" (천 조각)라는 별명을 얻었다.[12] 같은 날, 이브라힘은 체포되어 톱카프 궁전에 투옥되었다.[13] 쾨셈은 아들의 몰락에 동의하며 "결국 그는 너와 나를 모두 죽일 것이다. 우리는 정부에 대한 통제력을 잃을 것이다. 사회 전체가 붕괴될 것이다. 그를 즉시 왕좌에서 끌어내려라"라고 말했다.[15]

이브라힘의 여섯 살 아들 메흐메트 4세가 술탄이 되었다. 새로운 대재상 소푸 메흐메드 파샤는 셰이크 울-이슬람에게 이브라힘의 처형을 승인하는 파트와를 요청했다. "두 명의 칼리프가 있다면, 그 중 한 명을 죽여라"라는 메시지와 함께 그것은 허가되었다. 쾨셈 또한 동의했다. 두 명의 처형인이 파견되었는데, 그 중 한 명은 이브라힘 밑에서 일했던 수석 처형인이었다.[16] 처형인들이 가까워지자 이브라힘의 마지막 말은 "내 빵을 먹은 자들 중에 나를 불쌍히 여기고 보호해 줄 사람이 없단 말인가? 이 잔인한 자들이 나를 죽이러 왔다. 자비를! 자비를!"였다고 한다.[16] 어머니인 쾨셈 술탄과 관리들이 궁전 창문에서 지켜보는 가운데, 이브라힘은 1648년 8월 18일에 목 졸려 죽었다. 그의 죽음은 오스만 제국 역사상 두 번째 국왕 시해였다.

1648년, 이브라힘은 자신의 하렘에 있던 시녀와 여관, 환관 등 280명을 모두 자루에 넣어 보스포루스 해협에 던져 버리는 만행을 저질렀다.

예니체리 군단에 대한 과세를 시도한 아흐메트 파샤에 대해 예니체리들이 봉기하자, 울라마와 어머니 쾨셈 술탄까지 동조하여, 이브라힘은 폐위되어 살해되었다. 아흐메트 파샤 또한 살해되었고, 민중들의 분노를 사, 시신이 토막 난 채 흩어졌다. "헤자르파레"라는 단어는 "천 개"를 의미한다.

4. 2. 쾨셈 술탄의 동의

1647년, 대재상 네베신리 살리 파샤, 쾨셈 술탄, 그리고 셰흐울이슬람 압두르라힘 에펜디는 이브라힘을 폐위시키려는 계획을 세웠으나 실패했다. 살리 파샤는 처형되었고, 쾨셈 술탄은 하렘에서 추방되었다.[14]

1648년 8월 8일, 부패한 대재상 아흐메드 파샤는 분노한 군중에 의해 목 졸려 죽임을 당했고, 사후에 "헤자르파레" (천 조각)라는 별명을 얻었다.[12] 같은 날, 이브라힘은 체포되어 톱카프 궁전에 투옥되었다.[13] 쾨셈은 아들의 몰락에 동의하며 "결국 그는 너와 나를 모두 죽일 것이다. 우리는 정부에 대한 통제력을 잃을 것이다. 사회 전체가 붕괴될 것이다. 그를 즉시 왕좌에서 끌어내려라"라고 말했다.[15]

이브라힘의 여섯 살 아들 메흐메트가 술탄이 되었다. 새로운 대재상 소푸 메흐메드 파샤는 셰이크 울-이슬람에게 이브라힘의 처형을 승인하는 파트와를 요청했다. "두 명의 칼리프가 있다면, 그 중 한 명을 죽여라"라는 메시지와 함께 그것은 허가되었다. 쾨셈 또한 동의했다. 두 명의 처형인이 파견되었는데, 그 중 한 명은 이브라힘 밑에서 일했던 수석 처형인이었다.[16]

어머니인 쾨셈 술탄과 관리들이 궁전 창문에서 지켜보는 가운데, 이브라힘은 1648년 8월 18일에 목 졸려 죽었다. 그의 죽음은 오스만 제국 역사상 두 번째 국왕 시해였다.

4. 3. 처형

국고 부족을 야기한 다르다넬스 해협의 베네치아 봉쇄와 이브라힘의 변덕을 채우기 위한 전시 경제 기간 동안 과중한 세금이 부과되자 대중의 불만이 커졌다.[14] 1647년, 대재상 네베신리 살리 파샤, 쾨셈 술탄, 셰흐울이슬람 압두르라힘 에펜디는 술탄을 폐위시키려는 계획을 세웠으나 실패했고, 살리 파샤는 처형되었으며, 쾨셈 술탄은 하렘에서 추방되었다.[14]

다음 해, 예니체리들과 울레마 구성원들이 반란을 일으켰다.[12] 1648년 8월 8일, 부패한 대재상 아흐메드 파샤는 분노한 군중에 의해 목 졸려 죽임을 당했고, 사후에 "헤자르파레"(천 조각)라는 별명을 얻었다.[12] 같은 날, 이브라힘은 체포되어 톱카프 궁전에 투옥되었다.[13] 쾨셈은 아들의 몰락에 동의하며 "결국 그는 너와 나를 모두 죽일 것이다. 우리는 정부에 대한 통제력을 잃을 것이다. 사회 전체가 붕괴될 것이다. 그를 즉시 왕좌에서 끌어내려라"라고 말했다.[15]

이브라힘의 여섯 살 아들 메흐메트 4세가 술탄이 되었다. 새로운 대재상 소푸 메흐메드 파샤는 셰이크 울-이슬람에게 이브라힘의 처형을 승인하는 파트와를 요청했고, "두 명의 칼리프가 있다면, 그 중 한 명을 죽여라"라는 메시지와 함께 승인되었다. 쾨셈 또한 동의했다. 두 명의 처형인이 파견되었는데, 그 중 한 명은 이브라힘 밑에서 일했던 수석 처형인이었다.[16] 처형인들이 가까워지자 이브라힘의 마지막 말은 "내 빵을 먹은 자들 중에 나를 불쌍히 여기고 보호해 줄 사람이 없단 말인가? 이 잔인한 자들이 나를 죽이러 왔다. 자비를! 자비를!"였다고 한다. 어머니인 쾨셈 술탄과 관리들이 궁전 창문에서 지켜보는 가운데, 이브라힘은 1648년 8월 18일에 목 졸려 죽었다. 그의 죽음은 오스만 제국 역사상 두 번째 국왕 시해였다.

1648년, 이브라힘은 갑자기 자신의 하렘에 있던 시녀와 여관, 환관 등 280명을 모두 자루에 넣어 보스포루스 해협에 던져 버리는 만행을 저질렀다. 예니체리 군단에 대한 과세를 시도한 대신 "헤자르파레" 아흐메트 파샤에 대해 예니체리들이 봉기하자, 울라마와 어머니 쾨셈 술탄까지 동조하여 이브라힘은 폐위되어 살해되었다.

5. 가족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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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브라힘은 8명의 하세키 술탄을 두었는데, 이들 중 일부는 동시에 존재했다. 이는 무라드 4세 이후 칭호의 명성과 독점성이 상실되었음을 보여준다.[17][18] 술탄에게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한 것은 쉬베카르 술탄과 법적 아내가 된 휴마샤 술탄 뿐이었다. 이브라힘은 후궁이 아닌 여성에게도 집착하여 도시에서 징발하기도 했다. 그는 뚱뚱한 여자를 좋아하여 "콘스탄티노플에서 가장 뚱뚱한 여자"인 쉬베카르가 총애를 받았다.[19][20] 또한, 후궁 280명을 익사시켰다는 이야기가 있으나, 이는 과장된 것으로 여겨진다.[21][22]

이브라힘의 미니어처

  • '''부인과 후궁'''


이브라힘 1세는 8명의 하세키 술탄을 두었으며, 마지막 하세키 술탄은 그의 법적인 아내였다. 그 외에도 여러 명의 첩이 있었다.[23][24][25][26]

이브라힘의 하세키 술탄들은 하루에 1,000 아스퍼를 받았으며, 살리하 딜라슈브 술탄은 하루에 1,300 아스퍼를 받았다.[27] 이브라힘은 볼루, 하미드, 니코폴리스 산자크, 그리고 시리아 에야레트의 수입을 각각 살리하 딜라슈브, 마히엔베르, 사츠바을르, 시베카르 술탄에게 하사했다.[28] 그는 또한 이집트의 보물을 사츠바을르 술탄과 훔아샤 술탄에게 아낌없이 썼고,[29] 이브라힘 파샤 궁전을 훔아샤에게 선물했다.

그의 알려진 첩들은 다음과 같다.

  • 투르한 술탄: 바쉬하세키(제1 하세키)이자 메흐메트 4세의 어머니로, 발리데 술탄이자 섭정을 지냈다. 러시아 출신으로 본래 이름은 나디야였다.[30]
  • 살리하 딜라슈브 술탄: 아슈브 술탄 또는 아슈베 술탄이라고도 불리며, 두 번째 하세키이자 술레이만 2세의 어머니이자 발리데 술탄이었다. 세르비아 출신으로 본래 이름은 카타리나였다.[30]
  • 무아제즈 술탄: 세 번째 하세키이자 아흐메트 2세의 어머니였으나, 아들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 발리데 술탄이 되지는 못했다.[30]
  • 아이셰 술탄: 네 번째 하세키로, 1645년 1월에 이 칭호를 받았다. 타타르 출신이었다.[30][31]
  • 마히엔베르 술탄: 다섯 번째 하세키로, 1646년 5월 2일에 처음 언급되었다. 체르케스 출신이었다.[30]
  • 사츠바을르 술탄:[29] 여섯 번째 하세키로, 체르케스 출신이며 본래 이름은 레이라였다.
  • 시베카르 술탄:[30] 일곱 번째 하세키로, "수도에서 가장 뚱뚱한 여자"라고 불렸으며, 이브라힘의 정치적으로 활동적인 첩 두 명 중 한 명이었다. 아르메니아 출신으로 본래 이름은 마리아였다.
  • 훔아샤 술탄: 여덟 번째 하세키이자 이브라힘의 유일한 법적 아내로, 결혼 후 ''텔리 하세키''라는 별명을 얻었다. 조지아 또는 체르케스 출신으로, 이브라힘의 정치적으로 활동적인 첩 두 명 중 한 명이었다. 1672년 카이마캄인 이브라힘 파샤와 재혼했다.[30]
  • 자피레 하툰: 자리페라고도 불리는 조지아 첩으로, 쾨셈 술탄에 의해 이집트로 추방되었다.
  • 후비아르 하툰: 이브라힘이 한동안 열렬히 사랑했던 첩 중 한 명으로, 이후 이브라힘 아가와 결혼했다.
  • 셰케르파레 하툰: 이브라힘의 첩 중 한 명이었으나, 이후 무사히베(동반자), 하렘의 재무 및 안주인이 되었다.
  • 사키줄라 하툰.
  • 셰케르바누 하툰.
  • 하티체 하툰.
  • 대재상 헤자르파레 아흐메트 파샤의 아내: 이브라힘은 그녀와 사랑에 빠져 강제로 이혼하게 했다.
  • 셰이휠리슬람 무이드 아흐메드 에펜디의 딸: 이브라힘은 그녀를 하렘에 들이려 했으나, 아버지의 반대로 납치했다가 돌려보냈다.

  • '''자녀'''


이브라힘 1세는 적어도 10명의 아들을 두었다.[32][33][34][35][36]

  • ''(셰흐자데) 퓔란'' (1640년 이전, 콘스탄티노플 – ?) – 자피레 하툰 소생. 이브라힘이 셰흐자데였을 때 하렘의 규칙을 위반하고 잉태되었다. 쾨셈 술탄은 임신한 어머니를 익사시키라고 명령했으나, 키즐라르 아가시에 의해 구출되어 아들을 낳았다. 그는 "''검은 환관의 사생아''"로 알려지게 되었다. 쾨셈은 이를 알고 세 사람을 이집트로 추방했지만, 배는 공격을 받아 몰타로 가게 되었고, 그는 기독교로 개종하여 "''오스만 아버지''"라는 이름으로 설교했다. 이 이야기는 오스만 제국베네치아 공화국 사이의 관계를 악화시키는 요인 중 하나였다.
  • 메흐메트 4세 (1642년 1월 2일, 콘스탄티노플 – 1693년 1월 6일, 에디르네) – 투르한 술탄 소생. 오스만 제국의 19대 술탄.
  • 술레이만 2세 (1642년 4월 15일, 콘스탄티노플 – 1691년 6월 22일, 에디르네) – 살리하 딜라슈브 술탄 소생. 오스만 제국의 20대 술탄.
  • 아흐메트 2세 (1643년 2월 25일, 콘스탄티노플 – 1695년 2월 6일, 에디르네) – 무아제즈 술탄 소생. 오스만 제국의 21대 술탄.
  • 셰흐자데 무라드 (1643년 4월, 콘스탄티노플 – 1644년 1월 16일, 콘스탄티노플).
  • 셰흐자데 셀림 (1644년 3월 19일, 콘스탄티노플 – 1669년 9월, 콘스탄티노플 또는 에디르네). 그는 ''카페스''에서 살다가 죽었다.
  • 셰흐자데 오스만 (1644년 8월, 콘스탄티노플 – 1646년, 콘스탄티노플).
  • 셰흐자데 바예지드 (1646년 5월 1일, 콘스탄티노플 – 1647년 8월, 콘스탄티노플).
  • 셰흐자데 지한기르 (1646년 12월 14일, 콘스탄티노플 – 1648년 12월 1일, 콘스탄티노플) – 시베카르 술탄 소생.
  • 셰흐자데 오르한 (1648년 10월, 콘스탄티노플 – 1650년 1월, 콘스탄티노플) – 휴마샤 술탄 소생.


한때 이브라힘은 노예 여성의 어린 아들을 매우 좋아하게 되어, 자신의 아들 메흐메트보다 관계없는 아이를 더 선호했다. 메흐메트의 어머니 투르한은 극도로 질투심을 느끼고 이브라힘에게 분노를 터뜨렸고, 이브라힘은 격분하여 투르한의 품에서 메흐메트를 빼앗아 수영장에 던졌다. 메흐메트는 하인이 구해주지 않았다면 익사했을 것이며, 이마에 영구적인 흉터를 남겼다.[37]

이브라힘 1세는 적어도 열 명의 딸을 두었다:[38]

  • 사피예 술탄(1640, 콘스탄티노플 – ?) – 살리하 딜라쉡 술탄의 딸일 가능성이 있다. 대재상 헤자르파레 아흐메드 파샤의 첫 번째 부인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바키 베이와 결혼했다. 술탄 아흐메드 모스크에 있는 아흐메드 1세의 영묘에 묻혔다.
  • 파트마 술탄(1642년 9월~12월, 콘스탄티노플 – 1657)[39] – 투르한 술탄의 딸일 가능성이 있다.[40] 1645년 무사힙 실라다르 유수프 파샤와 결혼했으며, 그는 1646년 1월 22일에 처형되었다. 한 달 후 그녀의 아버지는 그녀를 무사힙 파즐르 파샤와 결혼시켰지만, 이브라힘은 몇 달 후에 그를 추방하고 이혼하게 했다. 그녀는 예니 발리데 모스크에 묻혔다. 투르한 술탄이 그녀의 무덤을 돌보았다.[41][42]
  • 괴우르한 술탄(1642, 콘스탄티노플 – 1694년 10월 27일, 에디르네) – 무아제즈 술탄의 딸일 가능성이 있다.[43] 1646년 11월 23일 자페르 파샤와, 함대 제독이자 재상 차우슈자데 메흐메드 파샤(1681년 사망)와, 1692년 1월 13일 헬바지 유수프 파샤(1714년 사망)와 결혼했다.[41][42][43]
  • 베이한 술탄(1645, 콘스탄티노플 – 1700년 9월 15일, 쉴레이만 1세 영묘, 쉴레이마니예 모스크에 묻힘) – 투르한 술탄의 딸일 가능성이 있다.[44] 1646년 퀴추크 하산 파샤와, 1647년 헤자르파레 아흐메드 파샤 대재상과, 1683년 우준 이브라힘 파샤(처형)와, 1689년 비이클르 무스타파 파샤(1699년 사망)와 결혼했다. 네 번째 결혼에서 그녀는 아들 술탄자데 후세인 베이(1690 - 1754)를 두었다.[41][42][45]
  • 아이셰 술탄(1646, 콘스탄티노플 – 1675, 카이로). 카이로의 총독 데프테르다르 이브라힘 파샤와 결혼했고, 1664년에 과부가 되었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그녀의 사촌이자 부다와 카이로의 총독인 술탄자데 잔불라드자데 후세인 파샤와 결혼했다.
  • 아티케 술탄 – 투르한 술탄의 딸일 가능성이 있다.[46] 1648년 사르 케난 파샤(1659년 처형)와, 1659년 보슈나크 이스마일 파샤(1664년 사망)와, 1665년 귀르쥐 메흐메드 파샤와 결혼했다.
  • 카야 술탄 (). 1649년 하이다라아자데 메흐메드 파샤와 결혼했으며, 그는 1661년에 처형되었다.
  • 윔미귈쉼 술탄 (), 그녀는 윔미 술탄이라고도 불렸다. 1653년 아바자 아흐메드 파샤(1656년 사망)와 결혼했으며, 결혼 직후 사망했다.
  • 하티제 술탄, 유아기에 사망했다.
  • 비칸 술탄(/1649). 이브라힘의 마지막 자녀로 사후에 태어났다. 쿨로울루 무사힙 무스타파 파샤와의 결혼이 제안되었지만, 그는 거절했다. 그녀는 1666년 1월 제라흐 카심 파샤와 결혼했다.

5. 1. 부인과 후궁

이브라힘 1세는 8명의 하세키 술탄을 두었으며, 마지막 하세키 술탄은 그의 법적인 아내였다. 그 외에도 여러 명의 첩이 있었다.[21][22][23][24]

이브라힘의 모든 하세키들은 하루에 1,000 아스퍼를 받았으며, 살리하 딜라슈브 술탄은 하루에 1,300 아스퍼를 받았다.[25] 이브라힘은 볼루, 하미드, 니코폴리스 산자크, 그리고 시리아 에야레트의 수입을 각각 살리하 딜라슈브, 마히엔베르, 사츠바을르, 시베카르 술탄에게 하사했다.[26] 그는 또한 이집트의 보물을 사츠바을르 술탄과 훔아샤 술탄에게 아낌없이 썼고,[27] 이브라힘 파샤 궁전을 훔아샤에게 선물했다.

그의 알려진 첩들은 다음과 같다.

  • 투르한 술탄: 바쉬하세키(제1 하세키)이자 메흐메트 4세의 어머니로, 발리데 술탄이자 섭정을 지냈다. 러시아 출신으로 본래 이름은 나디야였다.[28]
  • 살리하 딜라슈브 술탄: 아슈브 술탄 또는 아슈베 술탄이라고도 불리며, 두 번째 하세키이자 술레이만 2세의 어머니이자 발리데 술탄이었다. 세르비아 출신으로 본래 이름은 카타리나였다.[28]
  • 무아제즈 술탄: 세 번째 하세키이자 아흐메트 2세의 어머니였으나, 아들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 발리데 술탄이 되지는 못했다.[28]
  • 아이셰 술탄: 네 번째 하세키로, 1645년 1월에 이 칭호를 받았다. 타타르 출신이었다.[28][29]
  • 마히엔베르 술탄: 다섯 번째 하세키로, 1646년 5월 2일에 처음 언급되었다. 체르케스 출신이었다.[28]
  • 사츠바을르 술탄:[27] 여섯 번째 하세키로, 체르케스 출신이며 본래 이름은 레이라였다.
  • 시베카르 술탄:[28] 일곱 번째 하세키로, "수도에서 가장 뚱뚱한 여자"라고 불렸으며, 이브라힘의 정치적으로 활동적인 첩 두 명 중 한 명이었다. 아르메니아 출신으로 본래 이름은 마리아였다.
  • 훔아샤 술탄: 여덟 번째 하세키이자 이브라힘의 유일한 법적 아내로, 결혼 후 ''텔리 하세키''라는 별명을 얻었다. 조지아 또는 체르케스 출신으로, 이브라힘의 정치적으로 활동적인 첩 두 명 중 한 명이었다. 1672년 카이마캄인 이브라힘 파샤와 재혼했다.[28]
  • 자피레 하툰: 자리페라고도 불리는 조지아 첩으로, 쾨셈 술탄에 의해 이집트로 추방되었다.
  • 후비아르 하툰: 이브라힘이 한동안 열렬히 사랑했던 첩 중 한 명으로, 이후 이브라힘 아가와 결혼했다.
  • 셰케르파레 하툰: 이브라힘의 첩 중 한 명이었으나, 이후 무사히베(동반자), 하렘의 재무 및 안주인이 되었다.
  • 사키줄라 하툰.
  • 셰케르바누 하툰.
  • 하티체 하툰.
  • 대재상 헤자르파레 아흐메트 파샤의 아내: 이브라힘은 그녀와 사랑에 빠져 강제로 이혼하게 했다.
  • 셰이휠리슬람 무이드 아흐메드 에펜디의 딸: 이브라힘은 그녀를 하렘에 들이려 했으나, 아버지의 반대로 납치했다가 돌려보냈다.

5. 2. 자녀

이브라힘 1세는 적어도 10명의 아들을 두었다.[30][31][32][33][34][35]

  • ''(셰흐자데) 퓔란'' (1640년 이전, 콘스탄티노플 – ?) – 자피레 하툰 소생. 이브라힘이 셰흐자데였을 때 하렘의 규칙을 위반하고 잉태되었다. 쾨셈 술탄은 임신한 어머니를 익사시키라고 명령했으나, 키즐라르 아가시에 의해 구출되어 아들을 낳았다. 그는 "''검은 환관의 사생아''"로 알려지게 되었다. 쾨셈은 이를 알고 세 사람을 이집트로 추방했지만, 배는 공격을 받아 몰타로 가게 되었고, 그는 기독교로 개종하여 "''오스만 아버지''"라는 이름으로 설교했다. 이 이야기는 오스만 제국베네치아 공화국 사이의 관계를 악화시키는 요인 중 하나였다.
  • 메흐메트 4세 (1642년 1월 2일, 콘스탄티노플 – 1693년 1월 6일, 에디르네) – 투르한 술탄 소생. 오스만 제국의 19대 술탄.
  • 술레이만 2세 (1642년 4월 15일, 콘스탄티노플 – 1691년 6월 22일, 에디르네) – 살리하 딜라슈브 술탄 소생. 오스만 제국의 20대 술탄.
  • 아흐메트 2세 (1643년 2월 25일, 콘스탄티노플 – 1695년 2월 6일, 에디르네) – 무아제즈 술탄 소생. 오스만 제국의 21대 술탄.
  • 셰흐자데 무라드 (1643년 4월, 콘스탄티노플 – 1644년 1월 16일, 콘스탄티노플).
  • 셰흐자데 셀림 (1644년 3월 19일, 콘스탄티노플 – 1669년 9월, 콘스탄티노플 또는 에디르네). 그는 ''카페스''에서 살다가 죽었다.
  • 셰흐자데 오스만 (1644년 8월, 콘스탄티노플 – 1646년, 콘스탄티노플).
  • 셰흐자데 바예지드 (1646년 5월 1일, 콘스탄티노플 – 1647년 8월, 콘스탄티노플).
  • 셰흐자데 지한기르 (1646년 12월 14일, 콘스탄티노플 – 1648년 12월 1일, 콘스탄티노플) – 시베카르 술탄 소생.
  • 셰흐자데 오르한 (1648년 10월, 콘스탄티노플 – 1650년 1월, 콘스탄티노플) – 휴마샤 술탄 소생.


한때 이브라힘은 노예 여성의 어린 아들을 매우 좋아하게 되어, 자신의 아들 메흐메트보다 관계없는 아이를 더 선호했다. 메흐메트의 어머니 투르한은 극도로 질투심을 느끼고 이브라힘에게 분노를 터뜨렸고, 이브라힘은 격분하여 투르한의 품에서 메흐메트를 빼앗아 수영장에 던졌다. 메흐메트는 하인이 구해주지 않았다면 익사했을 것이며, 이마에 영구적인 흉터를 남겼다.[36]

이브라힘 1세는 적어도 열 명의 딸을 두었다:[37]

  • 사피예 술탄(1640, 콘스탄티노플 – ?) – 살리하 딜라쉡 술탄의 딸일 가능성이 있다. 대재상 헤자르파레 아흐메드 파샤의 첫 번째 부인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바키 베이와 결혼했다. 술탄 아흐메드 모스크에 있는 아흐메드 1세의 영묘에 묻혔다.
  • 파트마 술탄(1642년 9월~12월, 콘스탄티노플 – 1657)[38] – 투르한 술탄의 딸일 가능성이 있다.[39] 1645년 무사힙 실라다르 유수프 파샤와 결혼했으며, 그는 1646년 1월 22일에 처형되었다. 한 달 후 그녀의 아버지는 그녀를 무사힙 파즐르 파샤와 결혼시켰지만, 이브라힘은 몇 달 후에 그를 추방하고 이혼하게 했다. 그녀는 예니 발리데 모스크에 묻혔다. 투르한 술탄이 그녀의 무덤을 돌보았다.[37][40]
  • 괴우르한 술탄(1642, 콘스탄티노플 – 1694년 10월 27일, 에디르네) – 무아제즈 술탄의 딸일 가능성이 있다.[41] 1646년 11월 23일 자페르 파샤와, 함대 제독이자 재상 차우슈자데 메흐메드 파샤(1681년 사망)와, 1692년 1월 13일 헬바지 유수프 파샤(1714년 사망)와 결혼했다.[37][40][41]
  • 베이한 술탄(1645, 콘스탄티노플 – 1700년 9월 15일, 쉴레이만 1세 영묘, 쉴레이마니예 모스크에 묻힘) – 투르한 술탄의 딸일 가능성이 있다.[42] 1646년 퀴추크 하산 파샤와, 1647년 헤자르파레 아흐메드 파샤 대재상과, 1683년 우준 이브라힘 파샤(처형)와, 1689년 비이클르 무스타파 파샤(1699년 사망)와 결혼했다. 네 번째 결혼에서 그녀는 아들 술탄자데 후세인 베이(1690 - 1754)를 두었다.[37][40][43]
  • 아이셰 술탄(1646, 콘스탄티노플 – 1675, 카이로). 카이로의 총독 데프테르다르 이브라힘 파샤와 결혼했고, 1664년에 과부가 되었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그녀의 사촌이자 부다와 카이로의 총독인 술탄자데 잔불라드자데 후세인 파샤와 결혼했다.
  • 아티케 술탄 – 투르한 술탄의 딸일 가능성이 있다.[45] 1648년 사르 케난 파샤(1659년 처형)와, 1659년 보슈나크 이스마일 파샤(1664년 사망)와, 1665년 귀르쥐 메흐메드 파샤와 결혼했다.
  • 카야 술탄 (). 1649년 하이다라아자데 메흐메드 파샤와 결혼했으며, 그는 1661년에 처형되었다.
  • 윔미귈쉼 술탄 (), 그녀는 윔미 술탄이라고도 불렸다. 1653년 아바자 아흐메드 파샤(1656년 사망)와 결혼했으며, 결혼 직후 사망했다.
  • 하티제 술탄, 유아기에 사망했다.
  • 비칸 술탄(/1649). 이브라힘의 마지막 자녀로 사후에 태어났다. 쿨로울루 무사힙 무스타파 파샤와의 결혼이 제안되었지만, 그는 거절했다. 그녀는 1666년 1월 제라흐 카심 파샤와 결혼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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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서적 Padışahların kadınları ve kızları Türk Tarihi Kurumu Yayınlar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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